영국 캐머룬 정부의 보수주의 -영국 보수정치의 두 가지 전통의 맥락에서

영국 보수정치의 전통

영국의 보수당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보존하고 고수하는 정당이다. 전통적으로 그 것은 국가체제(the Establishment), 영연방(the Union), 대영제국(the Empire)의 세 기둥이었다(Charmley, 1996). 하지만 1880년대 이후 보통선거권이 확대되면서 보수당은 변화하는 정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원칙을 필요로 하였다(Ball & Holliday, 2002). 그 때 1872년, 멘체스터 자유무역홀과 크리스탈궁에서 자신의 상징적인 연설로 보수정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던 것은 디스레일리(Disraeli)였다. 그 연설에서 디스레일리는 ‘또 다른 보수당의 위대한 목적은, 대영제국을 유지하고, 우리 국가 체제를 받드는 것에 뒤지지 않는 이 목적은 우리 민중(people)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입니다’(Evans & Taylor, 1996, p. 8; Willetts, 1992)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것은 노동계급의 삶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불가피한 국가의 규제와 사적인 이해에 대한 개입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했다(Evans & Taylor, 1996). 이러한 디스레일리의 철학은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마치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것처럼 서로의 존재를 무시한 채 공통적인 생각과 감정들을 공유하지 않는 두 국가를 묘사한 그의 소설 Sybil에 잘 드러나 있다(Willetts, 1992, p. 11). ‘한 나라(One Nation)’ 보수주의는 디스레일리 철학에 기반 한 보수 전통으로의 접근법으로 정립되었다(Charmley, 1996).

솔즈베리(Salisbury)는 보수주의 전통의 디스레일리와는 반대되는 입장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사회 변화를 직면한 보수당의 첫 번째 지도자로서 그는 개입주의적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부상에 반대하여 자유, 사적인 이해, 사적 재산 그리고 사회적 안정의 수호자로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립하였다. 비록 솔즈베리가 대중 민주주의로의 이전이 불가피함을 받아들였을지라도, 그는 귀족계급의 질서를 유지하고 그들의 이해를 옹호하기 위해 전환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보수주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할 수 있다(Evans & Taylor, 1996).

디스레일리와 솔즈베리는 그들의 역사 안에서 보수정치의 두 가지 다른 노선을 보여준다. Willetts(1992)는 전통 보수주의의 세 가지 특성을 자유에 대한 헌신, 경제 관리에서의 자유 원칙, 그리고 복지 국가에 대한 인정 정도로 요약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의 책임에서부터 개인의 자유까지 보수주의의 스펙트럼 안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디스레일리는 전자의 가치(더 공동체적인 가치)를 대표하고, 솔즈베리는 보수주의 안에서 더 개인적인 가치를 대표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쪽만을 보수주의 전통으로 취급하고 다른 한쪽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일 수 있는 것이다.

Evans 와 Taylor는 (1996) 또한 디스레일리와 솔즈베리가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통한 사회 질서의 붕괴를 막기 위한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둘의 차이점은 그들의 지향하는 방향 보다는 수단, 예를 들어 채찍이냐, 당근이냐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더욱이, 이들에게 사회질서는 재산권과 재산권에 의해 확보된 개인적 자유의 기반에 대한 방어 수단을 의미한다(Wilson, 1992). 이것은 아마도 대처의 ‘재산 소유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Evans & Taylor, 1996).

영국 보수주의 안의 진보와 보수

2차 세계대전 이래로 보수당 정부에서 서로 다른 두 전통 사이의 순환 주기가 있다는 것이 영국 보수정치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그 한쪽은 ‘습파(wets)’라고 불리는 디스레일리의 ‘한 나라’ 보수주의 후손들과, ‘건파’라고 불리는 자유 시장의 옹호자로서 솔즈베리 정책의 후예들이 있는 것이다(Evans & Taylor, 1996; Green, 2002; Kavanagh, 1990; Willetts, 1992). 습파는 더욱 집합주의적 입장을 가지며, 계획이나 개입과 같이 정부의 보다 큰 역할을 옹호한다. 반면에 건파는 더욱 신자유주의에 가깝고, 안정된 물가를 위한 통화관리 정도의 역할을 제외하고는 되도록 정부의 개입이 축소되는 것을 옹호한다(Kavanagh, 1990; Willetts, 1992).

1950년대에 보수당 내각은 ‘건파’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1950년에서 1951년에 보수정당의 선거운동에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라(Set the People Free)’라는 선전구호와 함께 당시에 사회복지 체계가 부적절한 복지 수당과 과세 수준으로 인해 자유 시장 경제에 대한 인센티브를 줄인다고 비판하였다(Green, 2002). 습파를  전환점은 맥밀런(Macmillan)이 수상이 된 1957년과 경제 침체가 시작된 1958년 사이에 나타났다. 이때 경제위기 타계를 위한 임금 동결과 함께, 고용주, 노동조합 정부로 구성된 국민경제발전심의회(National Economic Development Council)이 설립되고 산업에 대한 보조금이 증액되는 등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이 강화되었다(Willetts, 1992). 그리하여 건파-습파 순환의 첫 번째 주기는 보수당이 실각한 1964년에 완료된다.

1964년과 1966년, 노동당에 대한 연이은 선거 패배로 보수당은 맥밀런 정부의 정책에서 등을 돌렸고, 세계 2차 대전 이래로 사회 민주주의적 정치적 합의에 대한 거부가 일어나면서 건파가 득세하게 되었다(Evans & Taylor, 1996; Gamble, 1983). 1970년에 셀던공원 전당대회(Selsdon Park conference)에 이어 선거강령에서 감세, 공공지출의 축소, 그리고 물가와 소득 통제 축소와 같은 대규모의 자유 시장 개혁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Green, 2002; Willetts, 1992).

하지만, 건파 주도의 히스(Heath) 정부 집권에 성공한 이후 갑자기 실업률의 증가와 노동자 계급의 저항에 직면하여 극적인 ‘선회(U-turn)’을 맞게 되어 결국 물가와 소득 통제, 그리고 공공지출의 증가로 돌아서 버렸다(Gamble, 1983). Holmes(1989)는 히스정부의 정책선회 결과 급진적인 복지 지출 증가, 정책 과정에 노동조합의 참여, 국유화의 확대 그리고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 케인즈의 완전 고용 정책, 에너지 위기 동안의 배급 카드의 발행과 포괄적인 소득 정책 등이 추진되었고, 이들 정책은 반 시장적 조치라는 측면에서 과거의 노동당 정부보다 훨씬 더 자유 시장에 반대하는 간섭주의로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1989년 대처정부의 집권과 함께 대두된 대처리즘은 학자들에 의해 분명히 습파의 ‘한 나라’ 정책을 거부한 전통적인 건파보다도 더 강한 경제적 자유주의로 여겨진다(Holmes, 1989; Jessop, Bonnett, Bromley, & Ling, 1988; Lynch, 1999; Willetts, 1992). 대처리즘이 하이에크(Hayek)와 같은 대륙 철학자들이나 프리드만(Friedman)과 같은 미국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고전 보수주의에서는 약간의 차이는 있다(Willetts, 1992). 이러한 대처리즘의 등장 이후 대처정부는 3번의 총선을 연속으로 승리하였고, 대처의 사퇴이후 등정한 메이저(Major) 정부까지 18년간 영국 현대정치 역사상 최장기 집권을 기록하였다.

보수당의 장기침체와 개혁파의 등장

하지만 보수당에게 최장기 집권 후에 찾아온 것은 장기간의 침체였다. 대처 이후 보수당의 몰락은 뒤를 이은 존 메이저(John Major) 수상이 예상을 깨고 첫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던 1992년에 시작되었다. 그 해 9월 유럽단일통화 구축을 위한 준비단계로 유럽각국 통화가 독일 마르크화와 일정환율을 유지하도록 만든 유럽환율체제(ERM)는 독일통일 이후 동독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면서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초고금리 전략을 취하면서 마르크화 가치가 폭등하자 위기를 맞게 되었다.

환율을 맞추기로 한 다른 국가들 역시 이를 위해 금리를 올려야 했고, 그 결과 자국경제가 얼어붙자 하나 둘씩 이 환율체제를 탈퇴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끝까지 환율체제를 고수하다가 이 약점을 파고든 조지 소로스의 공매도 공세에 파운드는 폭락하고 무리하게 환율을 방어하던 영국 중앙은행은 파산위기에 몰리면서 굴복하고 치욕적인 환율체제 탈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994년 노동당에서 토니 블레어가 신노동당의 기치를 들고 당수로 당선된 이후 모든 관심은 노동당에 쏠렸고 지지율은 완전히 역전되었고 그 것은 장장 14년 동안 이어진 침체의 늪의 시작이었다.

결국 보수당은 1997년 선거에서 사상 최대의 의석차를 노동당에 내어주며 치욕적인 대패를 경험하였다. 그 후 존 메이저는 즉각 사임하고 보수당 역사상 가장 젊은 윌리엄 헤이그(William Hague)가 당수로 나섰지만 정치적 중도를 장악한 노동당과 달리 조세감축과 같은 대처주의 공약에 매달린 결과 2001년 선거에서도 97년 참패 때보다 의석수를 고작 1석 더 늘리는데 그치고 당수는 또다시 사임했다. 2003년 노동당정부가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이후 노동당에 대한 지지는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보수당은 여전히 수권가능한 정당으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보수당은 고리타분하고, 폐쇄적이고, 공격적이며 여성이나 소수인종과 같은약자들은 배제하는 ‘포악한 정당(nasty party)‘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었다. 초선 의원들조차도 백인 남성 일변도였으며, 여성은 단 1명, 소수 인종은 전무하였다(White & Perkins, 2002). 2005년 선거에서 18개월 밖에 안된 당수 마이클 하워드(Michael Howard)가 선전하였지만 그것은 보수당이 잘했기 보다는 노동당의 인기하락에 대한 어부지리로 여겨졌다. 노동당의 득표율은 역대 집권 정부에서 가장 낮았지만 여전히 큰 의석수 차이를 유지하였고, 보수당 역시 득표율에서는 1% 정도 회복하는데 그쳤다. 여전히 보수당은 이민 통제와 치안 강화, 학교 규율과 같이 지엽적인 보수적 쟁점만 제기할 뿐 집권정당으로서의 비전이나 철학이 있어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해 12월, 혜성과 같이 등장한 데이비드 캐머룬(David Cameron)이 새 당수로 선출되면서 보수당은 비로서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젊고 세련된 캐머룬은 노동당을 침체에서 살려내었던 1990년대 블레어와 직접적으로 비교되면서 블레어가 노동당에서 경직된 좌파 이미지를 벗겼던 것 처럼 캐머룬은 포악한 우파 정당 이미지를 벗겨냈다. 여성과 소수자에게 적극적으로 후보 기회를 부여하기 시작하고 전통적인 경제 쟁점을 넘어서 삶의 질과 사회적 쟁점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이 ‘붕괴된 사회(broken society)’가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탈중심적이고 지역중심적인 대안 등을 내놓는 등 정책논쟁에 있어 주도권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캐머룬의 등장 배경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보수당이 노동당에게 두번째 참패를 당하고 나서 윌리엄 헤이그가 당수에서 사퇴한 이후 실시된 당수 선거에서 당시 예비 재무장관(Shadow Chancellor)으로 신노동당 정부의 정책이라도 옳다면 지지할 줄 알았던 마이클 포틸로(Michael Portillo) 보수당 개혁파의 희망으로 간주되었었다. 하지만 포틸로가 결선투표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떨어지고 결국 대처의 공개적 지지를 받은 이안 던컨 스미스(Ian Duncan Smith)가 당수로 당선되자 예비 외무장관(Shadow Foreign Secretary)이었던 프란시스 모드(Francis Maude)와 그 의 친구이자 예비 환경교통지역부 장관(Shadow State of Secretary for Environment, Transport, and the Regions)이었던 아치 노만은 예비 내각에서 나와 “고집이 있는 싱크탱크(thinktank with attitude)”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타임즈(Times) 칼럼리스트 출신의 마이클 고브(Michael Gove)가 결합하면서 정책교환소를 2002년에 설립하였다. 이를 중심으로 보수당 개혁파들이 당 밖으로 모이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분명했다. 영국의 보수가 대처시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경제에만 갇혀 있으면서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른 사회적 쟁점에 대한 논의에서는 존재감조차 희미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제적 자유주의 일변도의 한계를 넘어서 중도 우파로서 사회적 대안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이들은 정책교환소를 중심으로 그동안 영국 우파에서 간과했던 사회적 쟁점에 대해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책을 생산하면서 정관계와 싱크탱크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사실 실업, 복지, 지역개발, 주거와 같은 정책적 논의는 좌파가 주도하고 있었지만 정책교환소는 복지제도의 기업운영, 개발자에 더 적합한 개발규제, 지역사회 주민의 권한 증진, 주택 첫구입자에 대한 인지세 개혁 등 다양한 사회정책 영역에서 구체적이고 자유시장적인 대안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2005년 데이비드 캐머룬이 정책교환소에서 당수 선거에 도전장을 내었을 때 그의 당선 가능성을 점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것은 내부적으로 정책교환소의 운명 뿐 아니라 보수 개혁파의 운명까지도 건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었다(Beckett, 2008). 기실 데이비드 캐머룬은 의원이 된지 4년밖에 안된 초선 의원이었으며 1년 동안 예비 교육장관(Shadow Education Secretary)이었던 것이 유일한 당직 경험이었다. 그래서 당시 메이저 정부 외무장관(Foreign Secretary) 출신으로 선두 주자였던 데이브드 데이비스(David Davis)에 비하면 당내 지지나 인지도에서 한참 떨어지는 존재였다.

고리타분한 보수와 구분되는 젊고 세련된 보수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캐머룬이 두각된 것은 바로 당수 선거운동를 정책교환소에서 출범시켰던 바로 그 때부터였다. 기자들에게 과일 스무디를 나누어주며 카페바와 같은 분위기에서 캐머룬은 신선한 아이디어와 새로운 비전을 가진 후보로 비춰졌고 그 것은 같은 날 발족식을 한 데이비스와 대조되었다(Wheeler, 2005). 그 다음 주에 열린 당 전당대회에서 열린 후보별 연설에서 무대를 장악하고 메모도 없이 보수당의 새로운 세대를 역설하며 열정적인 연설을 보인 캐머룬은 단연 두각되며 선두로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당원 우편투표에서 데이비스의 두 배 이상을 득표하면서 새 당수로 선출되었다.

캐머룬 보수주의에 대한 평가

캐머룬이 보수당의 당수로 선출된 이후 이어진 2010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집권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2010년 총선에서 여유있게 보수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고전하였고, 결국 과반의석도 확보하지 못하여 자유당과 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대표적인 원인으로 제대로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던 캐머룬의 리더십이 거론된다. 기실 당시 보수당의 선거강령(election manifesto)의 제목은 ‘영국 정부로의 초대(Invitation to Join the Government of Britain)로 제대로 된 방향을 보여주는데 실패하여 당원들조차 설명하기 어려워했다는 후문이다.

이는 결국 캐머룬의 개혁적인 이미지는 표면적이었을 뿐 과연 습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유럽의 재정위기 상황에서 집권한 캐머룬 정부는 정부개입전략이 아니라 정부 재정긴축과 복지축소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권후 3년간 중앙과 지방정부 예산을 30% 감축시키는 급진적인 긴축정책을 추진하였고, 2013년부터는 다양한 저소득 지원 급여를 유니버설 크레딧(Universal Credit)으로 통합하면서 급여 상한선 이상 급여를 제한하는 제도(Benefit Cap)를 도입하였다. 경제위기 상황에서의 이러한 복지축소 정책에 대항하여 같은 해 국제적으로 저명한 사회정책 교수를 다수 포함한 전국의 영국대학의 교수 50여명이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내기도 하였다.

최근 영국의 사회적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최근 유니세프는 보고서에서 영국의 아동 4명 중 1명이 빈곤한 상태에 있으며 이는 연정 정부의 긴축정책에 의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2008년에서 2012년 사이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폴란드, 캐나다, 독일, 호주 등 18개의 선진국에서 아동빈곤이 개선되고 있는 반면 영국은 매우 선명하게 악화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Withnall, 2014). 이러한 가운데 캐머룬 정부는 명확한 보수당 정부로서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현재 노동당 역시 신노동당의 실각 이후 새로운 방향제시를 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독립당(UK Independent Party)와 같은 극우정당이 득세하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5월 유럽의회선거에서 승자는 보수당도, 노동당도 아닌 영국독립당으로 나타나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결국 이러한 흐름은 사회 통합적 측면에서 영국사회에 매우 불행한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야당인 노동당 뿐만아니라 집권 보수당에게 있어서도 영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큰 과제가 놓여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Beckett, A. 2008. “What can they be thinking?” Guardian. 9월 26일자
  • Charmley, J. (1996). A history of Conservative politics,1900-1996. London: Macmillan.
  • Evans, B., &Taylor, A.(1996). From Salisbury to Major:continuity and change in Conservative politics. Manchester: ManchesterUniversity Press.
  • Gamble, A. (1983). Thatcherismand Conservative politics. In S. Hall &M. Jacques (Eds.), The politics of Thatcherism. London:Lawrence and Wishart.
  • Green, E. H. H. (2002).Thatcherism: a historical perspective. In Ideologiesof Conservatism: Conservative political ideas in the twentieth centry.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 Holmes, M. (1989). Thatcherism: scope and limits, 1983-87.London: Macmillan.
  • Jessop, B., Bonnett, K., Bromley,S., &Ling, T. (1988). Thatcherism: atale of two nations. Cambridge: Polity Press.
  • Kavanagh, D. (1990). A New Right?In Thatcherism and British politics: theend of consensus? (2nd 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 Wheeler, B. 2005. “How Cameron won Tory crown.” BBC News. 12월 6일자
  • White, M. & A. Perkins (2002) “‘Nasty party’ warning to Tories.” Guardian 2월 9일자
  • Withnall, A. (2014) “UK child poverty soaring due to Government’s austerity measures, Unicef says.” Independent. 10월 28일자.
  • Willetts, D. (1992). Modern Conservatism. London: PenguinBooks.

발표 여의도연구소 간담회 “유럽 보수정당들의 중도화와 한국정치에의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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