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전환기, 사회복지학계의 역할

기조발표에서 우리나라가 현재 체제전환의 가능성이 높은 시기임을 지적하고 이에 맞춰 정치제도와 재정지출 구조 개혁, 비공식 취업 축소 등이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선 발표에서는 우리나라가 기존의 어떠한 복지체제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동안 탈정치화 되어있던 사회보장제도는 저발전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회적 위험은 고생산성 부분의 고속 성장에 의해서 축소될 수 있었고, 기업복지와 가족임금, 장기고용 등이 사실상 사회보장의 기능을 대체해 수행해 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저성장 부분에 있어서는 면세와 감세, 생산자 보조제도의 간접적 소득 지원 제도와 가족 간의 사적이전 등 ‘숨겨진 사회보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유지되어 온 기존 체제는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탈공업화와 기술혁신 등으로 더 이상 작동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유지가 어려워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 토론에서는 이러한 발표의 내용에 상당부분 동의하면서도 지금의 체제전환기에 과연 사회복지학계는 제 역할을 하고있는가라는 반성적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발표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체제전환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새로운 사회경제 연합이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책양상이 만들어지며 정치경제제도의 변화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를 위해 새로운 세력이 정당성을 확보하여 권력을 획득하고 새로운 정책을 입안해나가는 매우 능동적인 과정이 일어나야 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세력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제시해야하는 비전과 전략, 새로운 정책방향 등은 절대 저절로 생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내에서 관련 연구와 논의가 축적되어 있을 때 이를 기반으로 여론이 형성되고, 정치적으로도 반영될 수 있다. 이렇듯 복지국가로의 체제적 전환이 필요하다면 이를 위한 주체적 과정의 기초가 되어야할 사회복지학계는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위해 그동안 국내외 사회복지학계에서 있었던 이전의 복지체제에 대한 논의를 먼저 돌아보면서 복지국가 발전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 비추어 사회복지학계가 수행해야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우리나라 복지체제 논쟁: 생산적 복지체제

사실 우리나라 복지체제에 대한 학계내 논의는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걸쳐 한 차례 있어왔다. 1990년대 애스핑-앤더슨의 복지국가 체제에 대한 연구(Esping-Andersen, 1990)가 발표된 이후 유교적 복지국가(Jones, 1993), 동아시아 복지모델(Goodman et al, 1998) 등 아시아 국가의 복지체제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논의는 생산적 복지 자본주의(Holiday, 2000)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을 경제적 목적에 사회정책이 종속된 체제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는 새로운 논쟁을 촉발시켰다. 서구 복지국가들이 경제위기 상황에서 조정기나 축소기를 맞이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복지의 제도적 확대가 나타났고, 이 때문에 과연 이들 국가들이 여전히 생산적 복지체제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란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김연명(Kim, 2008) 등 한국 학자들은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제시하면서 더 이상 우리나라를 생산적 복지체제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재보험, 건강보험 등 주요 사회보험제도들이 보편화되었고,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으로 국민 생활의 최저선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으로 제도화 되었으며 건강보험의 통합과 국민연금 개혁과정에서 국민들이 하나의 제도 아래 들어오면서 보다 사회적 연대가 강화된 제도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건강보험의 통합, 국민연금의 개혁,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 등 주요 제도개혁 과정에서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노동조합 운동과 새롭게 부상한 중산층 중심의 시민운동이 연합하는 복지지향적인 정치적 연대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지형의 변화는 정부 내부에서 권력이 경제부처에서 복지부처로 이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Choi, 2012).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체제의 변화로 이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발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회의적이다. 제도적 확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Kwon & Holiday, 2007). 건강보험이 전국민에게 적용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 보장률은 절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보장 역시 생존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그마저도 백 만 명이 사각지대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국민연금 역시 근로연령인구의 절반가량이 제대로 된 연금 혜택에서 제외될 위험에 있으며, 고용보험의 실업급여 수준은 상한선 때문에 2명 이상의 부양가족이 있을 경우 기초생활보호 대상자 기준에 들어가는 수준이다. 발표문에서는 우리나라 예산구조도 여전히 개발국가 시대를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사업, 환경, 주택 및 지역개발 등 이른바 ‘개발’ 관련 예산의 비중은 16개 OECD국가의 평균보다 1.5배에서 1.8배 높은 수준이지만 사회보호 지출은 절반 정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복지지향적인 정치적 연대의 현실 역시 어둡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을 경험하였다. 언론자유지수 순위는 2006년 31위에서 2016년 70위로 추락하였고, 최근 UN 인권위원회 보고서에서는 법집행에 있어 기본적인 인권 기준도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못함을 지적하였다(UN Human Rights Council, 2016). 물론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지는 촛불시위로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지만 이것은 무너진 민주주의 회복을 의미할 뿐 사회복지의 제도적 개혁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재등장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2. 체제전환기적 특징: 사회적 위기의 심화

체제 전환은 일어났다고 할 수 있기 보다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이 전환이 표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기 보다는 근원적인 조건의 변화부터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정책이 경제적 목적에 종속되는 생산적 복지체제의 근본적인 조건은 이 체제가 사회적 위험에 사회정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는 기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사회적 위험이 체제 위협으로 발전하지 않으면서 안정적으로 체제를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정책의 경제적 목적에 대한 종속은 귄위주의 통치 또는 유사 권위주의 통치에 기반을 둔 기술관료들의 정책 주도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는 성공적인 경제성장에 의해 이러한 정책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또한 그 경제성장 전략에 의해 사회적 위험 역시 완화되면서 나머지 사회적 위험은 가족에 의해 일정수준 흡수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Holiday, 2000). 발표의 분석에 대입하자면 고생산성 부문이 대체했던 사회보장 기능은 성공적인 경제적 성장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고, 저생산성 부문의 ‘숨겨진 사회보장’ 역시 그러한 경제적 성장으로 정당화되는 경제우선 정책의 일부로서 정당화되고 기능할 수 있었던 영역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 조건은 빠르게 붕괴되고 있다. 고속 경제성장 구조는 1997년 이후 점차 저성장 구조로 고착화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노동소득분배율 또한 1998년 80.4%에서 2013년 69.5%로 악화되어 낙수효과 마저도 감소되고 있는 상황이다(Lee, 2015). 가족도 사회적 위험을 흡수할 수 있는 기제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이미 1·2인 가구가 가장 주된 가구형태로 정착해가고 있으며 가족의 기능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빠르게 변화해 왔다. 1998년만 해도 부모 부양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냐는 질문에 응답자 90%가 가족에게 있다고 응답하였지만 2014년에는 그 비율이 절반으로 떨어졌고, 본인(16.6%)이나 사회 또는 기타(31.7%)가 책임져야한다는 응답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통계청, 2014). 이런 가족 기능의 변화는 심각한 사회적 고립수준으로 이어지고 있다. OECD 최근 사회지표에서 50대를 대상으로 한 “믿고 의지할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가”란 질문에서 우리나라는 비교대상 34개국 중 34위로 국제적인 비교에 있어서도 고립정도가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었다(OECD, 2016).

기실 양극화, 저출산, 빈곤, 자살률 등 현재 급증하고 있는 사회적 위기의 징후들은 모두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지표들의 장기적인 추이들을 살펴보면 모두 경제위기가 발생했던 1997년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악화되었다가 위기가 극복되는 2000년대 초반에 약간 완화되는 듯 했지만 그 이후 본격적이고 지속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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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각종 사회지표 연도별 추이
자료: 김태완 외 (2008), 홍진표·최순호 (2011)

이러한 점은 한편으로는 다시한번 경제위기 시기 김대중 정부에서 이루어졌던 사회복지의 제도적 확대는 변화된 사회경제적 조건 아래서 증가하는 사회적 위험 대응에 실패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복지제도가 확대된 것은 맞지만 사회적 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체제로서는 기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생산적 복지체제 역시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 이상 소득보장을 대체할 수 있는 고속성장도 존재하지 않고, 가족도 이를 더 이상 완충시켜주고 있지 못한 것이다. 기존의 체제는 수명을 다해가고 있지만 새로운 대응 체제는 등장하고 있지 않는 가운데 더 많은 국민들이 빈곤으로 추락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다음 세대의 출산을 포기하고,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불안은 더욱더 높아져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사회적 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제대로 된 대응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면서 기존의 위기 징후뿐만 아니라 갈수록 새로운 징후가 출현하게 될 것이다. 증가하는 사회적 위험에 대해서 새로운 대응체계가 등장하지 않는 가운데 가계대출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물론 가장 주된 원인은 주거와 관련된 대출이다. 경제적 기반을 충분히 축적할 수 있었던 이전 세대에서는 (유사)상속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왔지만 경제위기 이후부터 그런 기반을 갖춘 세대가 점차 사라져가면서 주거보장이 아닌 대출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국내총생산 대비 가구대출 규모는 13년째 최고 수준이고(70% 이상), 가처분 소득대비 대출 규모(2015년 170%)는 OECD 평균(130%)을 넘긴지도 오래이다(조영무, 2015). 이러한 가계대출의 증가는 저소득층에서 더욱 높게 나타난다.청년 실업 역시도 초기에는 경제적 여유를 가진 부모세대가 그 위험을 감당을 할 수 있었지만 경제위기 전후로 출생한 세대들이 청년이 되면서 그 당시 경제적 기반을 만들지 못한 부모 세대가 더 이상 청년실업 문제를 감당할 수가 없게 되고 이는 청년빈곤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기존의 체제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여 사회적 위험과 위기가 급증하고 있는데도 정작 체제의 전환은 일어나지 않고 있는가. 문제는 사회경제적 조건은 충분히 변하였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변화, 정책적 전환, 어느 것 하나 일어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재 촛불시위로 인한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역량과 기대되고 있는 정권교체는 이러한 체제의 전환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이 가능하려면 복지지향적인 정치세력만 권력을 획득한다면 실현시킬 수 있는, 체제 전환을 가져올만한 전략적인 대안이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제시되고 있는 공약들은 모두 기존의 제도를 어떻게 보완한다는 정도이지 획기적인 전환의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놀랄 일도 아닌 이유는 이미 그 이전부터 그러한 대안적 논의가 학계에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구의 복지국가체제 전환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살펴보면 그 것이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3. 서구 복지국가 전환의 역사: 대안의 출현과정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서구의 복지국가의 성립은 상당히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빈곤 문제 등에 대한 최초의 제도적 대응이었던 빈민법(1601년)부터 시작한다면 350여년에 걸친 과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복지국가 발전에 대한 이론으로 흔히 권력자원이론이나 시민권이론, 산업화이론 등을 이야기하지만(Gilbert & Terrell, 2005) 계급정당의 출현과 집권의 과정에서, 정치적 참정권이 사회권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산업화를 위해 기술적으로 복지제도의 필요성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복지국가가 사회적 대안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하였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체제적 전환이란 중세의 봉건농경사회에서 산업화와 도시화를 동반한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역사적인 대전환의 과정이었다. 그러면서 전에 없던 대규모의 빈곤문제가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한 최초의 대응이 빈곤법이라는 매우 통제적이고 처벌적인 접근이었다. 그 이후 1834년 신빈민법까지 거주지제한법(1662년), 작업장테스트법(1722년)과 같이 더욱 처벌적으로 개편하였다가 다시 원외구호 금지를 폐지한 길버트법(1782년)이나 최저생계비 보조제도격이었던 스핀햄랜드법(1975년)과 같이 완화된 접근이 이루어졌다가, 신빈민법에서는 또다시 더욱 처벌적 접근으로 회귀하였다(박광준, 2003). 이러한 정책방향의 혼동은 당시 어떠한 조치에도 빈곤의 문제는 심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근본적으로는 당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위험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문제이고 어떠한 시대적 전환을 의미하는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 시대적 전환의 의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시작된 계기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대규모의 빈곤과 극단적인 불평등 속에 점증하는 사회적 불안에 대응하기 위하여 1905년 보수당 정부가 결성한 빈곤법과 빈곤구제에 대한 왕립위원회에서 1909년에 소수보고서를 발간하면서부터였다. 자선조직협회와 지방정부 인사로 이루어진 다수파와 동의하지 않고 별도의 보고서를 내놓은 페이비언 소사이어티와 노동당 인사로 이루어진 소수파 보고서에서는 왜 그동안의 빈곤법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어떠한 대응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였다(Wallis, 2009). 당시의 빈곤의 원인은 노동 수요의 변화 등 개인의 범위를 넘어선 구조적인 것이라고 진단하면서 이에 따라 단순 구제가 아니라 보건, 교육, 노령, 노동시장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체계적 예방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국민도 그 이하로 떨어져서는 안되는 특정한 삶의 수준을 국가가 책임져야한다는 ‘국민 기본선(National Minimum)’과 같은 복지국가의 기초적인 개념적 틀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체계적 진단과 대안은 단순한 과정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 소수보고서를 이끌었던 베아트리스 웹(Beatrice Webb)은 초기 자선조직협회의 활동에 참여하면서부터 빈곤의 현장을 뛰어다녔다. 영국 노동자의 삶에 대한 최초의 실증조사였던 “런던 시민의 생활과 노동 조사(Inquiry into the Life and Labour of the People of London)”(1886년-1902년)를 이끌었던 찰스 부스(Charl Booth)의 사촌으로서 이 조사활동에 참여하였고, 인보관 운동에 참여하면서 직접 런던 동부 노동자 거주 지역이었던 ‘이스트 엔드(East End)’에 들어가 방직공장, 정미공장 등에서 일하면서 직접 근거를 수집하면서 노동자의 삶과 경험을 이해하였다. 왕립위원회의 활동 역시 4년간에 걸친 방대한 조사연구 활동이었다. 이 기간 동안 지방의 빈곤 감독관부터 빈곤구제 대상자까지 직접 진술을 포함한 방대한 증거가 수집되었고 이러한 증거와 기록의 양은 60여권에 이르는 것이었다. 향후 영국 복지국가의 설계도라고 불리는 ‘베버리지 보고서’의 저자 윌리엄 베버리지는 인보관 운동을 선도하였던 토인비 홀의 부관장 출신이기도 하지만 바로 소수보고서를 만든 왕립위원회 활동 당시 베아트리스 웹의 연구원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영국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5대 악을 결핍, 무지, 질병, 무위, 불결로 정의하고 이에 대응하는 사회보장정책, 교육정책, 보건의료정책, 고용정책, 주거정책을 제안했던 것은 단지 1년 간의 연구결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기간에 걸친 방대한 연구의 축적과 대안의 모색이 없었다면 베버리지 보고서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베버리지 보고서가 없었다면 2차 세계대전 직후 새로운 국가에 대한 열망이 충만했을 때 전쟁 영웅이었던 윈스턴 처칠을 꺾고 빈곤법 철폐 운동 조직가 출신이었던 클레먼트 애틀리(Clemment Attlee)가 이끄는 노동당이 베버리지 보고서의 실현을 내걸고 단독 집권에 성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복지국가로의 체제 전환을 위해서 수 십 년의 연구가 축적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과연 체제전환기에서 우리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위험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질문한다면 매우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여전히 우리사회의 위험에 대해서는 서구사회의 연구에 기초하여 발전된 개념적 틀을 바탕으로 표면적으로 잡히는 통계 등에 의존하여 대강 어떠한 문제들이 있는지 정도를 알고, 피상적인 규모를 인식하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현재 체제적 전환을 이야기한다면 그 성격은 서구의 산업화 과정에 상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사회복지학계의 역할: 사회적 위험에 대한 진단과 대안 모색

사실 우리나라는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압축적인 산업화를 이루어냈지만 그 시대적 전환과정에서 서구와 같은 산업화에 따른 위기를 전면적으로 경험한 적은 없었다. 1950년대 당시 우리나라는 극빈에 시달리는 농경사회였지만 체제경쟁의 영향으로 비공산권 국가 중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토지개혁에 성공하였다(You, 2015). 가장 핵심적인 경제적 자산인 토지가 공평하게 분배되었고, 한국전쟁을 통해서 지주들이 보상받았던 정부채권은 폭락하여 기존의 계급구조 자체가 붕괴된 상태에서 산업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구에서는 산업화를 통해서 새로운 빈곤문제와 불평등 문제를 경험하게 되고 이것이 복지국가를 모색하게 된 근본적 이유가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반대로 산업화는 계급구조가 붕괴된 상태에서 빈곤을 극복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 산업화는 모두에게 기회로 작용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도 더욱 쉽게 경제성장은 사회보장을 대체할 수 있었고 그만큼 사회적 위기는 억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이제야 산업화에 의한 사회적 위험을 제대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산업화에 따른 사회적 위험 뿐 아니라 저출산과 고령화, 여성의 사회진출, 노동시장의 분절, 가족구조의 변화와 같은 탈산업화 시대의 새로운 사회적 위험 역시 어느 사회보다 극단적이거나 급격한 형태로 경험하고 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우리사회는 그 어떤 사회보다도 서구적 틀에 끼워 맞춰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사회의 독특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 아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위험을 제대로 연구하고 이해하는 것이 매우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체계적인 분석과 진단을 기초로 해야 이러한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체제 전환적 대안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회복지학계의 연구는 통계적이거나 부분적인 연구를 통해서 기존 개념에 맞춘 위험의 존재를 확인하고 대강의 규모나 양상, 유의한 관계 요인을 찾아내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문제 자체를 해소하는 것 보다는 다소 완화시킬 수 있는 기존 제도의 개혁과제 정도를 제시하는 데에 머물고 있다. 물론 이 과정은 그만큼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더 많은 사람이 더 깊은 고통을 경험하고 더욱 근본적인 사회적 위협이 나타나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후대는 지금의 사회복지학자들을 시대적 전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냉온탕을 오가던 이름도 없는 빈곤법론자처럼 기억을 할지,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일구었던 한 명 한 명의 어머니, 아버지로 기억을 할지 판단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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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2017년 한국사회복지학회 춘계학술대회 (4월 21일-22일, 여수 디오션) 기획주제 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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