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이제부터 문제는 복지야!

우리사회의 변화와 복지의 부상, 그리고 대선


몇 년 전부터인가 복지는 변방에서 정치의 핵심의제로 등장하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복지란 일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거나 마음착하고 돈 많은 사람들의 일 인양 치부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2008년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김상곤 후보가 ‘무상급식’ 공약을 내세워 당선된 이후 여야를 가리지 않고 앞 다투어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무상급식, 무상보육, 무상의료와 반값 등록금으로 이른바 ‘3+1’ 복지정책을 내세우기 시작했고, 복지를 ‘포퓰리즘’으로 몰아붙이던 정부여당은 지난 총선 전에 0~2세 아동 무상보육 정책을 전면적으로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박근혜 후보는 이미 오래전부터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내세우고 있고, 최근 등판한 안철수 후보는 ‘경제와 복지의 선순환’을 모토로 하고 있다. 가히 복지정치의 시대라 할 만 하다.

이러한 정치의 변화는 그만한 사회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발전국가’라는 개념으로 잘 설명되어왔다. 경제발전이 국가의 최상위 목적으로 설정되어왔다는 말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이후 지속적으로 두 자리 수 이상 경제성장률을 이룩해온,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장의 기록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경제발전은 모든 사회문제와 의제를 아우르는 최우선 목적이 되기에 충분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눈부신 성장 이면에 전체주의적인 국가통제가 있었기에 80년대 말 이후 ‘민주화’가 또 다른 사회의제로 등장하고 지속되었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 여전히 국가정책에서나 선거쟁점에서나 ‘경제발전’이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은 부인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역사는 왜 세계경제규모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음에도 사회지출규모가 OECD 평균의 절반 수준 밖에 안 되는 ‘저복지’ 국가에 머물고 있는가를 설명해주고 있다. 기실 덴마크,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국가는 물론이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캐나다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선진국’ 중 ‘복지국가’가 아닌 나라는 없다. 국가의 최상위 목적이 국민의 복지로 설정된 국가들이란 말이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개념은 무역으로 국부를 축적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중상국가’나 전쟁으로 영토 확장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전쟁국가’등과 구분되는 것으로 세계 대공황이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함께 민주주의 확대에 힘입어 20세기 민주주의 체제의 완성적 국가형태로 등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등장은 그 당시 서구사회가 겪었던 극심한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사회적 대응의 결과였다. 18세기 말부터 진행된 산업화는 전에 없던 국부를 창출했지만 또한 전에 없던 사회적 위기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전통적인 농촌사회가 붕괴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형성된 노동자들의 거주 지역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고, 농경사회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극심한 빈곤과 부랑인 문제는 사회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급기야 체제를 위협하는 공산주의 운동까지 확산되자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든 독일 비스마르크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1880년대에 의료보험, 산업재해보상보험, 노령폐질연금 등 세계 최초로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하였고, 이것은 현대 복지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이어서 1930년대 세계를 휩쓴 경제 대공황은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의 필요성을 일깨웠고, 세계대전을 통해 국가를 중심으로 한 단결을 경험한 서구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인 복지국가 건설과 확대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복지국가 건설에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었다. 물론 복지에 대한 이론과 사상을 제공한 것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사회자유주의자들이었지만 당시 사회문제에 대한 대응 필요성을 공감하고 국가를 중심으로 한 개입에 동의를 했던 것은 보수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영국에서 전후 집권한 노동당 정부에서 복지국가 제도들을 확립하였지만 그 제도를 지속적으로 확대시키고 사회복지지출을 증가시켰던 것은 이어진 보수당 정부였다. 이른바 복지에 대한 ‘합의 정치’ 시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합의 정치’는 70년대 말 보수당 수상 대처가 경제위기의 원인을 복지에 돌리는 ‘신자유주의’를 들고 나오기 전까지 지속되었었다.

우리나라에서 여야 대선 후보가 모두 복지의 확대를 주장하는 지금은 바로 이러한 복지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그동안 ‘발전국가’였던 우리나라에서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점차적으로 고성장 구조가 무너지고, 반대로 양극화, 고령화, 저출산 등 사회문제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최근에 묻지마 범죄, 가계대출 위기, 자살률 폭증과 같은 사회불안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거기에다가 또다시 ‘성장’을 내세워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실망이 자리 잡으면서 더 이상 ‘경제성장’은 매력적인 해법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복지’, ‘경제민주화’와 같은 평등과 형평의 정반대 가치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야 대선 후보가 모두 같은 복지를 이야기한다고 보기는 어렵니다. 여권의 박근혜 후보가 주장하는 ‘맞춤형 복지’란 다시 말하면 ‘선별적 복지’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래도 복지에는 개인의 몫이 있기 때문에 국가가 무조건 지원을 해주기보다는 필요한 사람을 ‘선별하여’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반면 야권으로 분류되는 문재인 후보나 안철수 후보는 ‘보편적 복지’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복지란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책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은 지금은 아직 이들을 비교평가하기가 어렵다. 앞으로 어떤 후보가 추상적 구호나 뻔한 공약의 나열이 아니라 정말 우리사회 위기에 대한 구체적 해법과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지, 유권자의 현명한 판단이 요구된다.


기고 동국대학원 신문 2012년 10월 15일자(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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