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선, 복지국가의 미래는 무엇이 만드는가

2012년, 대선이 남긴 것

2012년 대선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보수와 진보의 대회전이라고 칭해질 만큼 양 진영의 총력전이라고 평가되는 이번 대선에서 그만큼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복지학계 인사들 중 캠프에 결합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더욱 궁핍해진 서민의 삶에서 기인한 절박함과 역대 대선에서 복지에 대한 쟁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주목받은 선거라 직접적인 선거과정 참여는 어느 때 보다도 도드라져 보였다.

그런 만큼 대선 이후 들리는 허탈감은 더욱 커 보였다. 복지의 미래에 대한 우려와 회의도 교차하고 있다. 하지만 기실 공약의 측면에서 양측이 유사했던 것도 사실이다. 보육, 노인 빈곤과 요양, 보건의료 주요 분야에서 모두 국가 책임을 강화하고 대상과 급여를 확대한다는 기조에서 차이는 크게 보이진 않았다. 그 속도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새 정부가 그 기조를 얼마나 충실히 이행할지는 계속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렴은 성장담론이 지배했던 2007년 대선과 비교한다면 상상하기 어려웠던 변화임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특정 정치 진영의 승부차원을 떠나서, 이를 성장담론과 복지담론의 승부차원으로 본다면 복지담론의 완승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보수로서 혁신적으로 복지담론을 수용한 쪽이 진보로서 그만큼 혁신적인 복지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쪽을 이긴 셈인 것이다.

양측의 최종 공약집을 살펴보면 각 분야별로 복지확대 공약을 나열한 것에는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보수의 입장에서 이 같은 공약의 수용은 큰 변화이자 혁신이었다. 하지만 진보는 이에 대응하여 단순히 무상보육의 확대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성장과 발달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노인복지의 확대를 넘어서 어떻게 노인의 피폐한 삶이 안정된 삶으로 변할 수 있는지, 건강보험 급여의 확대를 넘어서 어떻게 국민의 건강한 삶이 보장될 수 있을지에 대한 차별화된 그림을 보여주진 못하였다. 궁극적으로 더 과감한 복지를 내세우면서도 이것이 침체된 경제와 어떻게 조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는 못한 것이다.

시대를 바꾼 영국의 싱크탱크, 독립성을 말하다

물론 이러한 측면으로 대선의 승부를 모두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무엇이 어떻게 사회 변화와 복지의 발전을 만들어내느냐를 볼 때 이 점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참고할 수 있는 것은 세계적인 복지담론에 있어 가장 극적이면서 선도적인 변화를 이끌어 왔던 영국의 역사적 경험이다.

영국은 복지국가 건설에 있어서도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잘 알려진 베버리지 보고서 등으로 선도적이었으면서 대처로 대표되는 복지축소의 신자유주의 역시 이끌었다. 그리고 블레어와 신노동당으로 상징되는 제 3의 길로의 전환 역시 영국이 앞장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계적인 복지담론의 변화마다 그 뒤에는 영국 스스로의 정치적 전환이 있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떻게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왔을까. 이러한 물음을 파고들면서 알게 된 것은 그 변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이를 위한 움직임은 작게는 10년, 길게는 반세기에 걸쳐 있었으며 그 변화 뒤에는 이를 만들기 위해 꾸준히 싸워온 주체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정치적 교체에 의해서였지만 그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독립성을 고수했던 싱크탱크가 만든 ‘여론의 기후(climate of opinion)’의 변화였다.

복지국가의 지식적 기초를 제공한 페이비언 소사이어티, 신자유주의 부활의 본거지였던 경제문제연구소(IEA), 신노동당의 시대를 열었던 공공정책연구소(IPPR), 보수당의 부활을 이끈 정책교환소(Policy Exchange)까지 굵직굵직한 역사를 만든 싱크탱크들의 사례는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싱크탱크들은 신자유주의던 제 3의 길이던 정치적인 가치 지향은 뚜렷하지만 이에 기초한 비전의 구체화를 위해 다양한 연구와 근거를 축적하되 절대로 현실 정치나 경제적 이해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독립성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과 지향에 대한 신뢰성을 광범위하게 획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꾸준한 연구와 근거를 제시하면서 여론 주도층부터 지배적인 사고를 바꾸어갔다. 그러한 수십 년의 과정 끝에 그 비전이 새로운 정치세력과 만나면서 역사적인 전환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복지국가의 전성기였던 1955년에 설립되어 그 때부터 신자유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수십 년을 키워 80년대 대처의 시대를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경제문제연구소였다. 이들의 회고에 따르면 설립당시 신자유주의적 주장은 천대와 비아냥거림의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은 꾸준히 신자유주의적인 정책대안들을 생산하면서 끊임없이 대학과 언론 등에 파고들었다. 그 결과 70년대에 들어서 점점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존재로 두각 되기 시작했고 이들의 조언을 듣기 위해 찾아간 보수당 인사 중 하나가 마가렛 대처였던 것이다.

복지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기실 이러한 경제문제연구소의 전략은 1945년 설립자인 피셔와 하이에크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에 감명 받은 피셔가 런던정경대 연구실을 찾아가 정치의 뜻을 밝혔을 때 하이에크는 단호히 사회를 바꾸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고 말했다. 사회는 오직 아이디어에 의해 바뀔 수 있고 합리적인 주장을 가지고 지식인에 이르면 사회는 이를 따라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교훈을 아이러니하게도 페이비언이 이끈 복지국가 건설에서 배운 것이었다. 하이에크는 “지식인과 사회주의(The intellectuals and Socialism, 1949)”에서 이렇게 썼다.

사회주의자의 성공으로부터 진정한 자유주의자들이 반드시 배워야하는 핵심 교훈은 이상주의자가 되었던 그들의 용기이다. 이것이 지식인의 지지를 얻게 해주었고, 그래서 공공 여론에 영향을 만들었고, 그래서 이제야 요원해 보이는 것을 매일 가능하게 만들었다.

경제문제연구소는 이러한 교훈을 충실히 이행하였고, 결국 그들의 바람대로 사회를 바꾸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거장 밀턴 프리드만은 이들을 “2차 세계대전 이후 30여 년간 지식 전투의 중심에 선 용사들”이라고 치켜세웠고 대처는 이들이 “우리의 승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칭송하였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1950년대에 잘해야 나치 취급을 받던 세월을 견디고 독립성을 고수하며 꾸준히 싸워온 결과였던 것이다.

대선은 끝났다. 그리고 복지국가를 주장하며 직접 대선캠프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허탈감을 남겼다. 하지만 성장담론에서 복지담론으로의 전환을 이번 대선에서 목도했던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복지국가의 미래는 정치적 승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 더욱 집착해야 하는 것은 특정 정치세력의 승리가 아니라 복지국가가 만들 실질적인 삶의 변화를 위한 더욱더 엄밀하고 구체적인 대안의 축적일 것이다.


기고 월간 복지동향 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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